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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출간된 '슬픔이 택배로 왔다'의 핵심어가 '택배'였다면 이번 시집의 키워드는 '편의점'이다. 노년의 정 시인에게 이제 슬픔은 추상적 정념이 아니라 매일 문 앞으로 배달되는 상자에 들어 있거나 문을 열고 누구나 출입 가능한 일상적 공간에서 마주하는 감각으로 변모된 듯하다.
표제작 '편의점에서 잠깐'에서, 편의점은 오래 전 작별한 '나'와 '당신'이 재회하는 공간이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각각 라면과 맥주를 사려다 어색하게 만나 둘은 '거짓의 입술'로 상대 부모님의 자동차 유지비 계산기 안부를 묻는다. 옛 생각도 잠시, 결별한 두 사람은 일회적인 조우 이후 다시 만날 까닭이 없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시인(화자)은 문득 깨닫는다.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돌아서서/ 결국 무엇이 순익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 오늘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우리은행 인터넷뱅킹 공인인증서 다시 만났으나…'(시 '편의점에서 잠깐' 부분)
사소하지만 초월적인 일상적 단어가 125편의 시집에 오롯하다. 자꾸만 얇아지는 시집들과 견주면 3권 분량이다. '서울의 예수'나 '수선화에게'에서 보여준 초기 시의 초월성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순댓국, 빈 술병, 담배꽁초, 횡단보도, 찬밥' 등의 평이한 사물이 대체했다.
든든학자금 중도상환 그러나 시어가 평이하다 해서 '불완전한 모순'이란 그의 시풍이 사라지거나 얕아진 건 아니다. '가득히 빈 술병'이란 모순된 상상은 놀랍다.
'나는 빈 술병만 보면 꽃을 꺾는다/ 빈 술병에 꽃을 꽂으면 죽은 꽃이 살아난다/ 죽은 모든 꽃이 살아나 향기롭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꽃을 보면서/ 나는 빈 술병에 가득 든 술을 마신다'(시 '빈 술 햇살론 금리 병' 부분)
정호승 시의 정서적 기반을 이루는 속죄에 대한 인식도 감지된다. 주차된 차가 강제로 끌려가듯, 인간은 불가피한 죽음에 처한다.
'나는 견인되었다/ 느닷없이 견인차가 와서 나를 끌고 간다/ 주차할 데 없이 저무는 내 인생을/ 길가에 잠시 세워뒀을 뿐인데 (중략) 그동안 저지른 수많은 대죄를/ 참회할 시간도 없 기업은행 대출상담사 이/ 오늘도 나는 견인되었다'(시 '견인' 부분)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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